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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정족산성, 전등사

취미생활~♣/외출 하기

by 달래~♡ 2019. 12. 2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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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강화도

여행일 : 2019. 11. 29. (금)

방문지 : 전등사 → 성공회강화성당 → 강화고려궁지 → 교동도 대룡시장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고구려 소수림왕 11)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전등사는 그만큼 기나긴 역사를 품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전등사는 삼랑성이라는 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부여·부우·부소)을 시켜서 쌓은 고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이라는 뜻을 가진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해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전등사의 꽃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대웅전의 높임말로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미타불,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를 두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보좌하는 보살들이 있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 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고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어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웅보전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불(보물 제785)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묘법연화경(법화경, 보물 제1908)’ 목판 104매가 보관돼 있었다.

묘법연화경은 범어로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투라라고 하며 백련 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법화경을 직접 만져볼 수는 없었지만, 유리문으로 된 책장에 보관돼 있어 가까이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방문당시 공사중 이어서 대웅보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없었다.


현재의 건물은 1621(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추녀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인 나부상(裸婦像)과 관련해선 흥미로운 전설이 내려온다.

나부상은 나녀상(裸女像)으로도 알려졌는데 벌거벗은 여인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나녀상은 광해군 13(1621) 대웅보전의 재건을 담당했던 도편수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도편수는 인근 주막에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있었고 그 여인에게 자신이 받은 품삯을 정기적으로 가져다 줬다고 한다. 서로 사랑했고 아내가 될 사람이니 앞으로 집안 살림을 맡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주막을 방문했을 때 그 여인은 도망을 가고 없었다.

    여인의 배신으로 화가 난 도편수는 복수를 결심하고 그 여인의 벌거벗은 모습을 나무 조각상으로 만들어 추녀 밑에 넣었다. 이를 통해 도편수는 그 여인이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창피를 당하고, 지붕을 받들며 고통을 받고, 아침저녁으로 스님들이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릴 때 좋은 말씀을 듣고 잘못을 참회하길 염원했다고 전해진다.

 

나부상은 대웅보전 각 귀퉁이에 하나씩 모두 4개가 있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다.

주먹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가 하면 손바닥으로 바치고 있는 모습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 한 쪽 손만 사용해 받치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전설이라 해도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리고 이를 허용한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대웅보전 마당에는 4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전등사는 조선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1615년에 재건됐는데, 이 나무는 재건 당시 심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 내부에 위치한 찻집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잠시 쉬어가자..




└▶ 각종 도예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

사고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역사기록과 중요한 문서 및 서적을 보관하던 전각을 말한다.

내가 방문시엔.. 아쉽게도 굳게 닫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유일본으로 남은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은 묘향산사고로 옮겨졌다가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 1(1660)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족산사고지에는 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이 있다.

두 건물은 1998년 복원 후 옛 현판을 달았다. 복원된 건물이긴 하나 옛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藥師殿)과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도 볼 수 있다.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1097) 만들어진 중국종인데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하마터면 귀중한 범종이 일본의 만행으로 없어질 뻔 했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본래의 장소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등사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고 갔더라면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텐데...

대웅보전의 닫집과 약사전, 범종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못한 점이 이내 아쉽다..

다음번에 방문하면 꼭 꼼꼼히 모두 둘러보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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