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릉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고, 릉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다.
└▶ 조선 왕릉의 단면도. 그리고 왕릉을 만드는 방법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 재미난 조선 왕릉 이야기
└▶ 조선 왕릉의 문양 : 릉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 조각품들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석인상의 변천
조선왕릉의 석인상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를 보인다.
조선 전기 석인상은 고려 후기에 제작된 왕릉 석인상과 유사하나 그에 비해 간략화 되었다.
조선 중기 석인상은 장대하며 단순화된 모습을 보인다.
조선 후기의 석인상은 전체 형태가 단순하지만 의복의 세부를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 (좌) 제1대 태조 건원릉 무석인 (우)제1대 태조 건원릉 문석인
└▶ (좌) 제11대 중종 계비 문정왕후 태릉 문석인 (우) 제11대 중종 계비 문정왕후 태릉 무석인
└▶ (좌) 추존 장조 융릉 문석인 (우) 추존 장조 융릉 무석인
└▶ 헌릉관인
태종 헌릉을 관리하면서 사용한 도장. 인면에는 헌릉관관방(獻陵官關防)이라고 새겨져 있다.
└▶ 명릉을 찾은 감회를 적은 현판
1756년 8월 1일 영조가 그의 아버지의 능인 숙종 명릉을 참배한 후 그 감회를 지어 성명응에게 쓰도록 한 현판이다.
★ 내용 : 옛날 신묘년(1711) 내 나이 18살 적에 명종 강릉과 문정왕후 태릉에 따라갔다. 이듬해 가을 총관으로 신덕왕후 정릉을 지켰다.
신축년(1721)에 왕세자가 된 후 형님을 따라 숙종 명릉을 참배한 것이 두번이다.
내가 왕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능원에 간 것이 마흔 아홉 번이고, 그 중에 열 두번은 머물면서 잤다.
갑술년(1754) 가을 생일날에는 본릉(명릉)을 찾아갔다. 2년 뒤 병자년(1756) 가을 새벽, 내 나이 63살이 되던 해 또 본릉을 찾아갔다.
올해 또 참배하니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근래에 장마 때문에 백성들의 일에 마음이 쓰이고 내가 거동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내가 거동하려 할 때 날이 개여서 화창하였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우리 조상님이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백성들을 위하는 뜻이다. 일에 따라서 감회가 일어나고 추모하는 정이 갑절이 된다. 아! 몸은 비록 돌아가나 마음은 조상에게 있다.
어느 때 바람이 그치고 나무가 움직이지 않을까. 사모하느 ㄴ생각 간절하여 마음이 더욱 서렵다.
갑술년(1754)에 이미 나의 심정을 기록하였지만 지금 다시 나의 회상을 적어둔다. 떠날 채비를 하고 서명응으로 하여금 깨끗이 쓰게 해서 재실 안 향*대청에 새겨 걸어두라고 한다.
갑자년(1756) 8월 1일 새벽에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신 서명응이 영조의 명에 받들어 삼*가 적는다.
(* 부분은 제가 촬영한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글자로 *표시 해 두었습니다.)
└▶ 왕의 '능행'에 대한 이야기. 왕은 정말로 많이 바쁘고, 외로운 자리였을것 같다.
└▶ 태릉은 알아도, 강릉은 몰랐다. 이번 기회에 강릉에 대해서 배워 좋았다.
└▶ 문정왕후 어보
제11대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보이다.
└▶ 명종 어보
명종(1534~1567 / 재위 1545~1567)이 승하한 해(1567년)에 제작한 시보는 임진왜란 중에 유실되어
1705년 숙종의 지시로 금보개조도감을 설치하고 다시 제작한 어보이다.
└▶ 인순왕후 어보
명종의 비 인순왕후(1532~1575)가 38세 되던 해 왕후에게 '의성(懿聖)'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보이다.
└▶ 태릉이야기, 강릉이야기 (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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